다하라성 (아이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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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하라성은 1480년경 토다 무네미쓰에 의해 축성된 아이치현 다하라시에 위치한 성이다. 센고쿠 시대에는 이마가와 씨의 지배를 받다가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에도 시대에는 후다이 다이묘가 다하라 번을 통치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대부분의 건축물이 철거되었다. 현재는 성터에 박물관, 신사 등이 있으며, 일부 유구와 재건된 시설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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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씨 - 스노마타성
스노마타성은 일본 전국시대 미노국에 있던 성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단기간 축조와 일야성 전설로 유명하지만 기소강 범람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스노마타 일야성 역사자료관이 건립되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다하라성 (아이치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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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다하라성 |
원어 이름 | 田原城 |
다른 이름 | 바에성 (巴江城) |
위치 | 다하라, 아이치현, 일본 |
성 종류 | 평성 |
축성 연도 | 1480년경 |
축성자 | 도다 무네미쓰 |
주요 건축 자재 | 석재 |
철거 연도 | 1872년 |
현재 상태 | 1990년 재건 |
공개 여부 | 공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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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건축가 | 도다 무네미쓰 |
주요 개축자 | 이케다 데루마사 |
주요 통치 가문 | 도다 씨, 이키 가문, 미야케 씨 |
추가 정보 | |
좌표 | 34°40′24.58″N 137°16′11.02″E |
2. 역사
미카와 만으로 뻗어 있는 아쓰미 반도 기슭 근처, 다하라 시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다하라성은 과거 만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하고 해운 통제에 용이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480년 센고쿠 시대에 도다 무네미쓰가 다하라성의 전신을 세웠다. 이후 마쓰다이라 씨족의 위협에 이마가와 씨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질 때 도다 씨족이 배신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내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마가와 씨족은 1550년에 다하라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씨가 패배한 후, 다하라성은 도쿠가와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혼다 히로타카와 혼다 야스시게가 성주로 봉사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을 할당했고, 도다 씨족은 영지를 빼앗기고 이기 타다쓰구에게 주어졌다.
도쿠가와 막부 설립 후, 도다 가쓰쓰구는 다이묘로 승진하여 다하라성으로 돌아왔다. 1664년, 그의 아들 도다 타다마사는 분고 국으로 전출되었고, 다하라 영지는 미야케 씨족에게 재할당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거주했다.
폐번치현 이후 1872년, 성 건물은 파괴되었고 현재는 해자와 석조 일부만 남아있다. 옛 성터에는 신사와 다하라 시 박물관이 있으며, 1990년에 가짜 야구라와 문이 재건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분메이 12년(1480년)경, 도다 무네미쓰(젠큐)가 다하라성을 축성하여 도다 씨의 미카와 만 지배 거점으로 삼았다.[2]16세기에 들어 인근 센고쿠 다이묘의 세력 확대로 인해, 도다 씨는 처음에는 마쓰다이라 씨에 속했다가 이마가와 씨로 소속을 바꿨다. 덴분 16년(1547년), 도다 야스미쓰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으로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스루가 국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배신하여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씨의 적대 세력인 오다 노부히데에게 보냈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분노를 사 다하라성은 이마가와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성주 야스미쓰도 전사했다.[3]
하지만 2010년 후반, 오카자키 성을 오다 씨에게 빼앗긴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스스로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냈다는 설이 유력해지면서,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다.[4] 더불어 다하라성 주변 상황을 볼 때, 덴분 16년(1547년)의 공격 당시에는 함락되지 않았고, 실제로 함락된 것은 덴분 19년(1550년)경으로 추정된다.[5]
이후 이마가와 씨의 성주 대리가 들어섰지만,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이마가와 씨로부터 자립한 이에야스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마쓰다이라 씨 가신인 혼다 히로타카가 성주가 되었고, 요시다 성(도요하시 시)을 하사받은 사카이 다다쓰구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이케다 데루마사가 요시다 성에 입성했고, 다하라성에는 이케다 가문의 중신인 이기 다다쓰구가 성주가 되어 다하라에 머물렀다. 이케다 데루마사 통치기에 돌담 수축 및 성곽 정비 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2. 에도 시대
분메이 12년(1480년)경 도다 무네미쓰에 의해 축성되어, 도다 씨의 미카와 만 지배 거점이 되었다.[2] 16세기가 되자 인근 센고쿠 다이묘의 확대로 마쓰다이라 씨를 거쳐 이마가와 씨로 소속이 바뀌었다. 덴분 16년(1547년), 도다 야스미쓰는 인질로 이마가와 씨의 본거지 스루가 국으로 보내지는 마쓰다이라 씨의 적자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배신하여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씨의 적대 세력인 오다 노부히데에게 보냈다. 이 때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분노를 사, 다하라 성은 이마가와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성주 야스미쓰도 전사했다.[3]하지만 2010년대 후반, 오카자키 성을 오다 씨에게 함락당한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스스로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냈다는 설이 유력해지면서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 자체가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4] 게다가 다하라 성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덴분 16년의 다하라 성 공격 당시에는 함락되지 않았고, 실제로 함락된 것은 덴분 19년(1550년)경으로 추정된다.[5]
이후 이마가와 씨의 성주 대리가 들어섰지만,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이마가와 씨로부터 자립한 이에야스에 의해 공략되어, 마쓰다이라 씨 가신인 혼다 히로타카가 성주가 되었다. 히로타카는 동미카와의 주요 거점인 요시다 성(도요하시 시)을 부여받은 사카이 다다쓰구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덴쇼 18년(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자 요시다 성에는 이케다 데루마사가 들어왔고, 다하라 성에는 이케다 가문의 중신인 이기 다다쓰구가 성주가 되어 다하라를 다스렸다. 데루마사의 통치 기간 동안 석벽 보수 및 성곽 정비 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 설립 후, 다하라 성에는 미카와의 다른 주요 성들과 마찬가지로 후다이 다이묘가 배치되어 1만 석 남짓의 작은 번을 형성했다. 처음에는 다하라 도다 가문의 지족인 도다 다카쓰구가 들어왔고, 간분 4년(1664년)에는 미야케 씨가 1만 2천 석으로 입봉하여 메이지 유신까지 200년 이상 지배했다. 미야케 씨는 현재 최고 재판소의 별칭인 미야케자카로 이름을 남겼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해자와 석조 일부를 제외한 원래 성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72년 메이지 신정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성 건물이 파괴되었다.[1] 옛 성의 중앙 본관 터에는 미야케 씨족의 조상에게 바쳐진 신사와 지역의 유명한 학자 와타나베 가잔에게 헌정된 신사, 그리고 다하라 시 박물관이 있다.[1] 1990년 다하라 시 박물관을 재건하면서 가짜 야구라와 문이 재건되었다.[1]3. 성의 특징
바다에 접한 작은 언덕에 축조되었으며, 바다와 해자에 둘러싸인 성곽의 형태 때문에 파강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축성 당시에는 동쪽에서 북쪽을 돌아 서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었고, 파(巴)자 모양으로 해자를 둘러 주곽을 지켰다. 16세기 초 토다 씨는 아쓰미 군 전역(현재의 다하라시에서 도요하시시의 도요 강・아사쿠라 강 남안까지) 및 지타 반도의 일부를 영유했다. 토다 씨는 아쓰미 반도뿐만 아니라 미카와 만의 해상 지배를 꾀하여, 반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바다에 접한 다하라 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오이쓰 성, 오사키 성, 후타츠키 성 등 토다 씨가 반도 내에 축성한 성들은 모두 미카와 만 또는 미카와 만으로 흘러드는 아사쿠라 강에 면해 있어, 토다 씨가 해상 지배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1]
1590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히가시미카와에 들어서자, 본거지를 요시다 성으로 삼고, 다하라 성도 성대(城代)로 들어간 이키 타다쓰구에 의해 정비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구루와의 배치나 석축 등은 기본적으로 이 시기 또는 이케다 씨 이후에 들어온 토다 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에도 시대에는 다하라 성 남쪽에 조카마치가 형성되었다. 17세기 후반경에는 다하라 성 동쪽의 큰 만에 대규모 간척이 이루어져, 바다에 면했던 다하라 성 혼마루는 육지에 노출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1]
또한, 일부 무가 저택이나 번교(藩校)인 세이쇼칸 등을 둘러싸듯이 외곽도 형성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촬영된 옛 사진에 따르면, 주곽의 벽은 해삼벽으로 되어 있으며, 니노마루의 야구라는 층탑식 2층 건물이었다 (현재 재건된 것과는 형태가 다르다).[1]
4. 현재의 다하라 성터
현재 다하라 성터에는 석재를 비롯한 유구는 많이 남아 있지만, 건물은 쇼와 이후 재건된 것이다. 성터 대부분은 지역 주민을 위한 공공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 혼마루: 미야케 씨의 시조이자 남조의 충신 고지마 다카노리를 모시는 바에 강 신사가 있다. 9월 중순에는 연례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려 지역 주민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신사는 미야케 씨가 분카 연간에 니노마루에 건립한 사에서 혼을 옮겨온 것이다.
- 니노마루: 니노마루 야구라가 재건되었지만, 옛 사진을 보면 널빤지 외장으로 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다. 현재 다하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1990년대 박물관 건설 당시 시설과 통로 재정비를 위해 많은 유구를 훼손한 것은 비판받았다. 박물관 건설 이전에는 시립 보육소로 사용되었다.
- 산노마루: 호국 신사가 있으며, 와타나베 가잔, 무라카미 노리치, 오카다 도라지로 등 향토 위인의 현창비가 함께 건설되었다.
그 외에 오테몬이 재건되었지만 다소 과도한 장식으로 보인다. 석재는 16세기로 추정되는 노즈라즈미(자연석 쌓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다하라시 북부에서 생산되는 석회암이 섞여 있어 지역색을 나타낸다.
성의 외곽에도 오랫동안 토루 등이 남아 있었지만, 최근 재개발로 대부분 붕괴되었다. 현재 다하라 중부 초등학교 남쪽에 약간의 석재와 토루가 남아 있다.
번교였던 세이쇼칸 터는 다하라 중부 초등학교가 되었으며, 북쪽에는 와타나베 가잔을 주신으로 하는 가잔 신사가 건설되었다. 세이쇼칸의 이름은 다하라 성 서쪽 교외에 있는 아이치현립 세이쇼 고등학교에 계승되었다.
성의 남쪽과 서쪽 길은 당시 무가 저택이 늘어서 있던 곳으로, 재개발로 도로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확장되었지만 일부는 성하 마을의 풍치를 남기고 있다.
5. 접근
도요하시 철도 아쓰미선 미카와타하라역에서 북쪽으로 도보 약 15분.[7]
참조
[1]
서적
日本の古城5 補遺<西日本編>
新人物往来社
1977
[2]
서적
古地図で楽しむ三河
風媒社
2016
[3]
간행물
田原城の歴史1 企画展示室1
田原町博物館
2018-07 #date=2018-07 要페이지번호에 있는 날짜
[4]
서적
徳川家康 境界の領主から天下人へ
平凡社
2017-06
[5]
논문
高野山平等院供養帳と三河国衆
岩田書院
2020
[6]
서적
田原城・田原藩
巴江倶楽部(旧特定非営利活動法人NPO巴江倶楽部)(旧田原藩士族団)
2015
[7]
웹사이트
田原城跡|田原市観光ガイド【渥美半島観光ビューロー公式サイト】
http://www.taharakan[...]
201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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